WPP 회장, 마틴 소렐(Martin Sorrell)의 등장, 통치 그리고 그의 몰락

WPP 회장, 마틴 소렐(Martin Sorrell)의 등장, 통치 그리고 그의 몰락

세계 최대 광고 마케팅 지주 회사의 창립자이자 최고 경영자인 마틴 소렐은 “나는 그들이 나를 쏠 때까지 여기에 머물 것이다!”라고 말했다. 지난 주말,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실제로 그렇게 했다 (본문 중에서)

 

아이온스는 마틴 소렐의 아내인 크리스티나 팔콘에게 남편이 은퇴한 것을 상상할 수 있는지 물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광고 회사인 WPP의 설립자, 그리고 그의 최고의 광고 회사를 생각하며 “전혀요!”라고 그녀는 히스테리컬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이가 내 부엌에서 나이프와 포크를 순서대로 놓는 것을 상상할 수 있겠어요?”

작년에 WPP에서의 자신의 미래에 대해, 소렐은 아내에게 “그들이 나를 쏠 때까지 나는 여기에 있을 거야!”라고 말했다.

지난 주말,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실제로 그렇게 했다.
4월 14일, WPP 이사회는 소렐의 “개인 비리” 의혹을 조사하기 위해 고용한 외부 법률 회사에 의해 사임했다고 발표했다. 우리는 확실한 이유를 모른다; 이사회와 소렐은 “엄격한 기밀”이라고 말하면서 조사 결과를 공유하지 않았다. 이러한 투명성하지 않은 일단의 사태는 WPP 경영진과 광고업계 내에서 허리케인 같은 루머를 불러일으켰다. .

미디어와 광고 세계에서, 소렐과 WPP는 큰 비중을 차지한다. 세계 최대의 광고회사와 마케팅 자이언트들은 매년 텔레비전, 라디오, 신문, 잡지 그리고 구글, 페이스북을 포함한 디지털 회사에도 7조 5천억의 광고를 집행하고 있다. 광고계에서는 월 스트리트 저널이 자체 광고에 출연시키기로 선택한 소렐보다 더 유명인사는 없다.

분명한 것은 WPP 이사회가 소렐이 심각한 위반을 하지 않았다면 그를 해고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사회는 소렐에 대해 “그의 혐의 사항에는 WPP의 중요한 자금문제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말한 바 있으며, 그를 해고한 후에도 그를 “퇴직”으로 처리했다.

한 증권 전문가는, 확실한 것은, “엄격한 기밀”에도 불구하고, 소렐의 해고에 대한 진정한 이유가 결국은 밝혀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번 주 초까지 영국 금융당국과 증권거래위원회가 조사결과를 발표할 것으로 내다봤다. WPP가 약 2조1천억원에 가까운 매출을 올리고 있고, 소렐이 작년에 680억원을 벌어들인 회사라면, 1억원의 재료일까, 혹은 50억, 200억의 재료일까?

한편 소렐(73)의 특별한 부고 기사가 잇따랐다. 소렐의 유대인 조부모는 우크라이나, 폴란드, 루마니아에서 런던으로 이민을 왔다. 런던의 빈곤한 이스트 앤드에서, 그의 조부모와 부모는 반유태주의 차별을 느꼈는데, 이것이 그들의 성을 슈피츠 버그에서 소렐로 바꾼 이유이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그의 아버지 잭은 13살에 학교를 중퇴, 왕립 음악 대학의 장학금을 포기하고, 결국 러시아 유대인, 맥스와 프란시스 스톤 형제의 기구 가게에서 매니저로 일했다. 마틴이 태어날 때인 1945년 2월, 잭은 750개의 점포를 경영하고 있었고, 소렐은 어느 정도 편안함을 즐겼다. 어린시절, 출산 중에 남동생이 죽은 후, 마틴은 샐리 소렐과 잭 소렐의 모든 관심을 받는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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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루터 킹, Jr.의 최종 연설

잭 소렐은 메이 페어의 27농장 거리의 주택가에 있는, 그의 아들의 지저분한 2층 런던 타운 하우스 사무실에 있었다. 그 사무실에서 가장 큰 사진은 잭 소렐의 사진이었다.

이 그림은 약간 색이 바래었고, 리갈 미엔의 남자로, 정돈된 수염과 검은 눈,  검은 머리는 곧게 뒤로 빗어 올렸으며, 정장은 흰 물방울 무늬와 하얀 사각형 주머니가 있었다.

잭 소렐의 닫힌 입에는 마치 억압하고 있었던 것처럼 웃는 기색이 보였다. 아버지와 아들은 신체적으로 닮은 데가 거의 없었다. 마틴의 머리카락은 회색에 가깝고, 더 짧고, 테가 없는 안경을 쓰며, 콧수염이 없었다.

그의 아버지와는 달리, 그는 자신이 세계 최대의 광고 & 마케팅 기업인 WPP을 설립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는 사업가라고 생각한다.

마틴은 말했다.

“우리 아버지는 13살에 학교를 떠나야 해서, 장학금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별로 혜택을 받지못했다고 생각한다. 그는 매우 좋은 두뇌를 가지고 있었지만 노예처럼 일하고, 그럼에도 소유주는 아니어서 아마도 화가 났을 것이다. 아버지는 그가 가지고 있지 않았던 혜택을 나에게 주기를 원했기 때문에 우리는 매우 가까웠다.”

역사가 사이먼 샤마는 “하버 대쉬어 아스케스”의 소년 학교에서 11살 때 마틴을 만났고, 마틴을 “매우 억센” 그러면서 “꼭 껴안고 싶은 따뜻함으로 가득찬” 사람으로 자주 묘사했다.

1963년 그들이 함께 캠브리지에 있는 그리스도 대학에 입학했을 때, 그는 그들이 “형제처럼 친밀했다”고 말했다. 금요일에 마틴의 엄마는 은색 호일과 플라스틱으로 구운 닭고기를 싸서 캠브리지행 기차에 실었다. “내가 그걸 집어 들었어.”, “닭은 여전히 따뜻했지.” 라고 마틴이 회상했다. 샤마는 치킨으로 리조또를 만들었다. 그들의 모든 음식이 그렇듯이, 치킨은 매우 유대교적이었다. “우리는 약간 좌파적인 지오니스트들이었지요”라고 샤마는 말했다. 그들은 연간 6회 발행되는 잡지인 ’캠버리지 오피니언’을 함께 편집하고 출판했다.

당시 캠브리지의 급우들 사이에서, 작가, 교수, 또는 변호사가 되기를 희망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마틴은 달랐다. 경제학을 전공한 그가 사업가가 되겠다는 결심은 “강철 같았다”고 샤마 교수는 말했다. “마틴은 잭이 학대를 당했다고 항상 생각했고, 스톤 형제와 초기 빈곤 때문에 혜택을 못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하버드 경영 대학원을 졸업하고 첫번째 직업은 스포츠계와 연예계의 국제 에이전트인 IMG의 창업자이자 회장인 마크 맥코맥 씨를 위해 일했다.

그는 런던에 IMG 사무실을 열어, 70년대 초반까지 일했고 이후 제임스 걸리버 어소시에이트에 재정 고문으로 합류했다. 이 회사는 사치&사치를 인수한 광고 회사에 투자했고, 1976년 사치가 최고 재무 책임자를 물색할 때 소렐이 채용되었다.

그 후 9년 동안 소렐은 모리스와 찰스 사치를 위해 일했는데, 그는 종종  머리를 맞대고 상대방을 응시하며 사치를 강력한 지주 회사로 탈바꿈시키는 합병을 준비했다.

대부분의 거대 산업에서 그랬듯이, 규모가 클수록 유리하다는 믿음은 만연했다. 규모는 가격을 올리고 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 지렛대를 제공했으며, 고객에게 더 큰 세계적 입지를 제공했으며, 효율성을 제공한 시너지를 가능케 했다. 그리고 모회사의 마진을 높이기 위해 새로 합병한 회사에 경비 절감 압력을 가함으로써 이익을 증대시켰다.

사치는 그 산업이 두개의 계층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수의 거인들과, 사치와 먹이가 되고있는 중간에 있는 그 밖의 모든 이들로 구성된 두 계증…
그곳에서 일한 9년 동안, 소렐은 종종 “제3의 형제”라고 불렸는데, 그 형제들은 전략가로서 날카로운 사람들이었고, 동시에 그들의 직원이었음을 분명히 했기 때문이다.

“사치의 가장 좋은 점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라고 소렐은 덧붙였다.

“나는 그가 매우 행복해했던 것이 기억 나지 않는다.”라고 샤마가 회상했다. 소렐은 “나는 스스로 뭔가를 하고 싶었기 때문에 그들을 떠났다. 나는 40살이었고 남자 폐경이 왔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소렐은 아버지의 명성을 더럽히고 싶지 않으려고 했다. “내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들도 있었는데, 아버지는 항상 나에게 ‘네가 좋아하는 분야에서 명성을 쌓아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명성을 쌓는다는 것은 너가 한 일을 사람들이 존중해주고, 그 결과로서 너는 영향을 얻게되는 것이다’ 고 했습니다” 1989년 잭 소렐이 사망할 때 까지 마틴은 그의 아버지와 매일 이야기했다.

1985년 소렐은 떠날 것을 준비하면서, 와이어 앤 플라스틱 제품(WPP)으로 공개적으로 기록된 와이어-바구니 제조 업체(W.P.P)에 개인적으로 투자를 했다. 이듬해 사치를 떠날 때 그는 셀 회사로 WPP를 다시 설립했고 그가 동료와 공유했던 런던 오피스에서 사무실을 차렸다. 그의 WPP 지분은 16퍼센트에 달했고, 그 다음 18개월 동안, WPP는 18개의 회사를 사들였다. “시장에서 우리의 영향력은 12억원에서 1,800억원으로 상향되었습니다.”라고 소렐은 말했다.

이때까지 광고 대행사들은 적대적 인수 합병을 젠틀하게 거부하는 태도를 보였다. 소렐은 이러한 젠틀한 불문률들을 무시했다. 1987년에 상어는 고래를 삼킬 준비가 되었다. 소렐은 WPP보다 매출이 13 배나 큰 J.월터 톰슨을 인수하기 위해 적대적인 입찰을 했고, 여기에는 세계의 가장 큰 PR회사인, 힐&놀턴도 포함한다.  이로인해 소렐은 상당 부채를 떠안았으나, 인수 과정의 일부였던 일본 부동산 투자로부터 수익을 얻어 5,660억원에 달하는 재무적 부담을 완화시켰다.

소렐은 잭 웰치가 회사를 설립하지 않고 인수하여 제너럴 일렉트릭을 건설한 것처럼, 그의 제국을 건설했다. 소렐은 재무적으로 성공한 최초의 광고 지주 회사를 세웠다. 2년 안에 그는 톰슨의 수익을 두배로 올렸다.

1989년에 그는 8,640억원을 들여 오길비&매더의 적대적 인수를 계획했고, 데이비드 오길비는 소렐을 “혐오스러운 작은 똥”이라고 공개적으로 낙인 찍었다.

소렐은 곧 영&루비컴과 그레이 라는 다른 두개의 큰 에이전시를 삼켰고,  WPP는 112개국에 3000개의 사무실에서 20만명의 직원이 일하는 회사로 성장했다.  2017년까지, WPP는 업계 최고인 17%를 약간 넘는 이익률을 기록했다.

소렐은 북미와 영국에 의존하는 회사에서부터 중국과 같은 신성장 국가들에서 매출의 50퍼센트까지 달성하는 회사에 이르기까지 적극적으로 WPP를 다각화함으로써 높은 이윤을 유지했다. 오늘날 중국은 1만 3천명의 직원을 두고, WPP내에서 세번째로 큰 매출을 올려주는 국가이고, 인도에서의 WPP 시장점유율은 50퍼센트에 이른다.

소렐은 2000년에 여왕으로부터 마틴 경 (Sir Martin)의 기사 작위를 받았으며, 그의 방패에 좌우명으로 “지속성과 속도”를 선택했다.

마틴 경의 야망으로 인해 WPP는 1991년에 거의 파산 직전에 까지 이르렀다. 전환 우선주의 도래와 세계적 불황이 겹쳐 WPP 주가와 매출이 나락으로 떨어졌다. 은행들은 그에게 지불을 재촉하고 있었고, 샤마는 소렐과의 점심을 회상하면서, 그는 “WPP는 정말 심각한 곤경에 처해 있고 거의 파산 직전이다”고 말했다. 소렐은 회사를 재무적 위기로부터 구하기 위해 은행에 그의 지분을 제공함으로써 WPP의 부채를 줄이는 거래를 겸허하게 받아들였다.

1992년에, WPP는 다시 일어섰다. WPP는 역사적으로 매년 약 50개의 회사를 인수했고, 전 세계의 마케팅 회사들의 지분 대부분 또는 일부의 지분을 공격적으로 매입했다.  WPP 웹 사이트에 따르면, WPP는 120개국에서 운영하고 있는 412개 회사의 전체 또는 일부 지분을 소유하고 있다.

WPP에는 힐&놀턴을 포함해서 PR지주회사로는 Burson-Marserveller, Finsbury등이 있고; 데이터, 테크놀로지, 여론조사회사로는 Xaxis, Kantar, the Benenson Strategy Group, Penn Schoen Berland등이 있고; 공공,로비 관련 회사로는 Dewey Square Group, Glover Park Group, 그리고 Wexler & Walker Public Policy Associate등이 있으며; 그 외에도 다양한 회사들이, 헬스케어 커뮤니케이션, 디자인, 다이렉트 메일 분야의 주요 플레이어들이다. 또한 Vice Media, Refinery29, 전 Wayne Stein, Fullscreen 같은 디지털 콘텐츠 회사들의 상당한 지분을 소유하고 있다. WPP는 Nielsen과 경쟁하고 합병된 디지털 측정 회사 Rentrak, ComScore의 지분 5분의 1을 소유하고 있다.

샤롯데 비어스가 오길비&매더의 최고 경영자가 되기 위해 소렐에 채용되었을 때, “나는 그가 이 모든 BTL회사들을 합병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내가 틀렸어요. 저의 WPP 주식은 오늘 시장에서 매우 강합니다” 라고 그녀는 말했다.

현재, 20조 이상의 매출을 올리고 있는 WPP는 매출의 4분의 3은 “돈 드레이퍼”식의 광고와는 아무 상관이 없고, 대신에 모두 “미디어, 데이터 그리고 디지털”와 관련이 있다고 소렐은 말했다. 다른 대형 광고 마케팅 회사들과 마찬가지로 WPP도 단지 광고 회사가 아닌 마케팅 에이전시를 인수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미국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마케팅 매출은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중국에서 발생된다. 하지만 지난 세기 후반에 중국과 인도의 인구가 각각 10억명 이상이 되리라는 것을 보기위해서 굳이 수정 구슬이 필요하지 않았다. 두 나라는 현재 인터넷 사용자 수에서 세계 1위와 2위를 차지하고 있다.

<매드 맨>의 돈 드레이퍼의 모든 에피소드를 열렬히 보았던 소렐은 “그는 여전히 뉴욕 오피스나 시카고 오피스, 디트로이트 오피스에서 일하고 있었고, 미국에 집중했다. 미국은 가장 큰 시장이었고, 여전히 그랬다. 그러나 30년 전에 내가 시작했을 때 글로벌 광고의 4분의 3은 미국 동부연안에서 일어났고, 그것은 더 이상 이야기가 아니다”고 말했다.

소렐을 위해 일한 사람들은 젊은 루퍼트 머독을 위해 일했던 사람들이 느꼈던 것처럼 그가 항상 그들을 보고 있다고 느꼈다. 소렐은 윔블던에서 테니스 경기에 참관할 때에도 블랙베리를 통해서 거의 즉각적으로 이메일에 응답했다. 오길비의 CEO에서 자발적으로 물러난 마일 영은, “매일 소렐에게서 하루에 3 ~ 4 통의 이메일을 받는다. 나는 그의 열렬한 팬이다. 그는 광범위하고 전략적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필요할 때에는 매우 디테일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헸다.

약속에 대한 그의 뛰어난 기억력으로, 끊임없는 이메일로 마이크로 매니저로서 그의 명성을 쌓는데는 도움이 되었지만 임원으로서 목표에는 미치지 못했다.

이 글에 인용되기는 원치 않았지만, 몇몇 WPP 경영진들은 소렐이 어깨 너머로 세세하게 관심을 기울이면서 거의 질식사를 시켰다고 불평했다. 그를 마이크로 매니저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소렐은 그것은 “칭찬이다”고 했고, “작은 도시” 같은 규모의 회사의 CEO는 회사의 세부 사항을 꿰차고 있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소렐이 매니저 같았던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창립자로서의 그의 정체성에서 부터 시작해야한다.

소렐은 전 런던 시장이었던 보리스 존슨의 이름은 직접 거론하지 않았지만, 그가 2014 년에 영국에서 가장 높은 보수인 600억원 (2015 년에는 950억원)에 달하는 보수를 받는 경영진을 언급하면서 주주들의 비난에 이의를 제기했다.

그는 2012 년 6 월 파이낸셜 타임즈에 쓴 글에서 “나는 고액 연봉의 매니저가 아니라 오너로 행동했다.”고 했다. 아마도 ‘자격’에 대한 그의 감각이 때때로 이사진과의 충돌을 가져왔을 것이다.

“그렇다, 나는 그것은 정부 관료가 아닌 주인과 기업가처럼 행동하기 위한 실행의 목적으로 생각했다.” 오늘 현재 소렐이 소유하고 있는 WPP의 지분은 2 %에 불과하며, 그는 자신의 투자를 다각화하지 않고 대신 자신의 회사가 이루는 성과에 연동되게 그의 부를 묶는 방식을 선택했다. “나의 부친은 ‘너가 가장 잘 아는 회사에 투자를 하라.’고 그는 말했다.

소렐의 주변에는 많은 비방자들이 있었다. 런던에서 그는 “6/21”로 불리는데, 6월 21일은 올해 가장 짧은 밤이고(동양의 절기상으로 ‘하지’), 소렐은 가장 짧게 봉사한 ‘기사(Knight)’여서 등뒤에서 그를 그렇게 부른다. 소렐에 비판은 한권의 노트로 채울 수 있을 정도였다 그는 두려워했고, 경쟁자들과 많은 동료들은 사적으로 그를 비난했다. 하지만 비평가들은 완전한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만약 데이비드 오길비가 그를 “우스운 작은 똥”이라고 불렀을 때 우리가 그 그림을 그냥 그대로 얼려 버렸다면, 우리는 다음에 일어난 일을 놓쳤을 것이다. 처음으로 그들이 만난 후, 오길비는 소렐에게 “놀랍게도 나는 당신을 좋아했다. . . . 당신이 내 책을 인용했을 때 나는 너무나 기분이 좋았으며,

WPP라는 이름의 당신 회사의 회장으로 나를 초대했을 때 더욱 그랬습니다. 나는 흔쾌히 당신의 초대를 수락했습니다. . . . 내가 당신에게 너무 공격적이었던 것에 매우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 비록 그것은 우리가 만나지 전의 일이긴 했지만…”

오길비가 암으로 죽어 가고있을 때, 소렐은 그를 방문하여 그의 아내를 돌보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오길비&매더의 전 CEO였던 마일 영에 따르면, 소렐은 그렇게 했고, “오길비의 간호사에게 돈을 지불한 것은 마틴이었습니다.”

최근 몇 달 간, 고객사가 광고비 지출을 억제하고, 경쟁이 치열해졌고, 대행사 스스로 미래의 재무적 전망을 낮추고 그들의 주가도 망가졌기 때문에 소렐과  에이전시 비즈니스는 재무적으로 타격을 입었다

소렐이 매출 감소의 원인을 고객사가 마케팅 비용을 삭감한 것에 기인했다고 비난하는 것은 잘못된 판단일 수 있다. 그는 성장을 확신했고, WPP직원들에게 고객사에 더 나은 서비스를 위해서 통합된 팀으로 “수평적으로” 일할 것을 주문하면서, 비즈니스는 점차 나아질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매출 감소가 좀 더 심오한 다른 것에서 기인한 것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 인터넷으로 야기된 실존적 위기, 즉 에이전시 같은 중간거래상들을 없애고 광고로 인해서 방해받는 것들을 싫어하는 소비자에 의해서 야기된 침체라면 말이다.

그 질문에 대한 명확한 대답을 빠른 시간내에 듣기는 힘들 것이다. 한편, WPP로 부터의 소렐의 강제 퇴장은 평범하지않은 매우 특별하게 성공적인 비즈니스의 전설에 오점을 남겼다.

소렐이 떠나는 슬픔에 대해, WPP 집행부의 한 시니어 멤버는 유명한 레슬링 선수인 단 게이블을 상기시켰다. : “그는 화려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고, 약간의 흠이 불공정하게 손상되었습니다. 게이블은 대학과 올림픽에서 위대한 선수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는 무패였습니다 – 그가 마지막 경기에서 패하기 전까지는…”

이 글은 2018년 4월 17일, The New Yorker에 실린 Ken Auletta의 기사를 번역한 글이며, 이 작품의 일부는 저자의 다음작품인 “프레너미: 광고 비즈니스의 서사시적 붕괴 (그리고, 그외  모든 것)”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https://www.newyorker.com/news/news-desk/the-rise-reign-and-fall-of-wpps-martin-sorrell